개혁은 끝났는가

꼭 1년 전이다.  촛불민심이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키고, 노도와 같은 방송 적폐 청산의 요구와 울분이 거리를 뒤덮었던 그 때, SBS는 민심의 파도에 올라탈 것인가, 아니면 파도에 휩쓸려 좌초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지난 시절, 권언유착과 방송사유화의 적폐에 신음하며, ‘신뢰’와 ‘구조’의 위기에서 허덕이던 우리 일터 SBS를 바로 세우기 위한 조합원들의 열망이 반영된 싸움이 바로 RESET! SBS! 투쟁이었다.

성역이었던 대주주의 전횡을 고발하고, 방송 자율성과 독립 경영 확보를 위한 싸움에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은 결연히 나섰으며, 그 결실은 역사적인 10.13합의로 귀결됐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투쟁은 어디에 와 있는가? 우리는 과연 미래를 새롭게 열어갈 개혁을 완수해 내고 있는가? 노동조합은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고 중단 없는 혁신의 길을 다져나가고자 한다.

10.13 합의 1주년…지금 우리는?  

10.13 합의는 크게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우선 SBS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다시 쌓고, 오롯이 최고의 방송 콘텐츠로 미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방송자율성을 확보하고 이로 인한 경영 성과가 지주회사 체제 하에서 부당하게 외부로 유출돼 SBS 구성원들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도록 독립 경영 체제를 확고히 하는 방안이다.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바로 ‘사장 및 공정방송 최고 책임자들에 대한 임명동의제’ 이다. 지난 해 11월 임명동의 투표로 출범한 현 경영진은 SBS 전 구성원들의 동의 아래 10. 13 합의의 온전한 이행과 지속가능한 미래 구축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안고 있는 셈이다.

‘신뢰의 위기’ 넘을 긍정적 변화,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우선 신뢰의 위기 극복을 위한 방송 자율성 확보라는 과제는 10.13합의 이후 가장 가시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할 만 하다.  삼성의 에버랜드 땅과 올림픽 유치 로비에 대한 연속 탐사 보도 등을 통해 거세됐던 권력 견제와 비판 기능이 조금씩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올해 방송대상과 이달의 기자상 연속 수상으로 내외의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임명동의제 시행 이후 대주주를 포함한 최고 경영진의 부당한 보도 간섭과 통제가 줄어들면서 뉴스 취사선택의 자율성이 크게 신장된 측면이 긍정적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실제 최근 시사인의 언론 신뢰도 조사결과, SBS는 지난 해보다 2.6%P 시청자 신뢰가 높아졌으며,순위 역시 전체 3위로 한 계단 높아졌다.

 

<출처: 시사IN 576호>

하지만 여전히 1위 JTBC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2위 KBS를 추격하기에도 숨이 가쁜 상황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보도 참사 이후 고착화된 구도는 여전히 강고하다.  일부 긍정적 조짐만 믿고 안도하기에 갈 길은 여전히 멀다.

RESET! SBS! 투쟁은 부당한 간섭과 방송 사유화 관행을 사실상 사멸시켜 방송 자율성 확보의 길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시청자 신뢰 제고는 여전히 구성원들의 책임으로 남아 있다. 한 마디로 신뢰도 제고를 통한 경쟁력 확보 여부는 SBS 구성원들의 실력 문제인 셈이다. 최근에도 ‘그것이 알고 싶다’ 등 일부 프로그램이 부실 검증과 공정성 논란에 휩싸였고, 지난 달 평양 남북 정상회담 특보 과정에서는 높은 조직간 장벽과 소통 부재 속에 역사적인 능라도 5.1 경기장 연설이 SBS에서만 불방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느 때보다 넓게 열린 방송 자율성의 길에서 시청자 신뢰를 확고히 하는 일은 결코 ‘의욕’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변화된 인식과 상황 속에서 우리 내부의 판단기준과 행동양식을 철저히 재평가해 무너졌던 기본과 원칙을 다시 세우고, 그 토대 위에 ‘정의’와 ‘민주주의’. ‘자율성’과 ‘공정성’을 한결같이 옹호하는 우리 내부의 규율, 보도준칙과 편성규약을 모든 책임자와 일선 제작진이 뼈에 새기고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유일한 방책이다.

지속되는 ‘구조의 위기’…대주주와 사측은 의지가 있는가?

Reset! SBS! 투쟁이 방송사유화의 고리를 끊어낸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반면, SBS의 경쟁력과 미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구조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합의 이행은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다.   지난 해 노동조합과 대주주, 경영진은 지주회사 체제 아래서 지속돼 온 이익 유출, 그로 인한 SBS의 구조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10.13 합의의 비공개 부속 합의에 담아냈다. 10년 간 지속돼 온 논란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SBS를 위한 사업구조를 만들자는 정신을 담은 합의로 2017년 연말 내로 구조개혁 방안을 마련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콘텐츠허브, 플러스 등 관계사와의 거래관행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행법 테두리에서 가능한 최선의 대안을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 밖에 없었으며, 노사간 이견도 적지 않아 합의는 2018년 3분기까지 지연돼 왔다. 노동조합의 대폭적인 양해와 배려 속에 가까스로 타협안을 마련했으나, 이번에는 콘텐츠허브 경영진이 온갖 이유를 둘러대며 합의 이행안에 대한 동의 절차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플러스의 경우는 한 술 더 떠 10. 13 합의 이행을 위한 논의 자체를 거부하다시피 하고 있으며, SBS 이익 유출에 기반한 사내 유보금으로 자체 프로그램 제작 및 편성에 멋대로 투자하는 등 노동조합과 대주주간 합의 정신에 반하는 경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특히 대주주가 SBS 직접 경영에서 손을 뗀 이후, 합의 정신을 거스르는 홀딩스 계열사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 노동조합은 깊은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과연 SBS를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이익순환 흐름을 복원하고자 하는 합의 이행 없이, SBS 미디어그룹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거꾸로 SBS를 주변화하고 배제하는 그룹 운영 전략이라도 몰래 짜고 있는 것인가? 경영 일선 퇴진으로 형식적 소유와 경영의 분리 조치를 취했으나 여전히 그룹내 주요 의사 결정을 대주주의 결단 없이 불가능하다. 합의 이행의 지연 혹은 무력화 움직임은 그렇다면 대주주의 의사 표현인가? 합의의 이행인지 파기인지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하기 바란다. 노동조합은 사측에 기회를 줄 것이나,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10.13 합의정신에 반하는 미디어 그룹 내의 어떠한 의사결정도 합의파기로 간주하고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다.

노동조합은 10.13 합의의 엄격한 준수와 후속조치 이행 속도를 봐 가며, RESET! SBS! 투쟁 과정에서 제기된 창업주와 노동조합 구성원들 간의 신뢰회복 문제를 해결해 나갈 구상이었으나, 관련한 합의 이행의 속도 저하와 지연은 이와 같은 조합의 선의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10.13 합의를 넘어서는, 미래 전략과 경영 모델 재편이 가능해야 위기돌파가 가능하며, 이 과정에서 노와 사, 대주주가 모두 머리를 맞대는 추가적인 대타협이 절실하다. 대타협의 전제 조건은 온전한 합의의 이행과 신뢰회복이다. 10. 13 합의의 온전한 이행은 지상파 방송 시장의 급격한 위축과 혁명적 미디어 환경 변화 속에서 다음 단계의 혁신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상황의 엄중함을 깨닫고 즉각 성의있는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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